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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겨진 소녀 - 클레어 키건 소설, 다산북스, 2023

클레어 키건(Claire Keegan)은 누구인가?

1986년 아일랜드 위클로에서 태어났다. 17세에 미국으로 건너가 로욜라대학교에서 영문학과 정치학을 공부했다. 이어서 웨일스대학교에서 문예창작 석사 학위를 받아 학부생을 가르쳤고, 더블린트리니티칼리지에서 철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가디언>은 키건의 작품을 두고 "탄광 속의 다이아몬드처럼 희귀하고 진귀하다"라고 평한 바 있다. 이는 그가 24년간 활동하면서 단 4권의 책만을 냈는데 그 모든 작품들이 얇고 예리하고 우수하기 때문이다. 키건은 1999년 첫 단편집인 <남극>으로 루니 아일랜드 문학상과 윌리엄 트레버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2007년 두 번째 작품 <푸른 들판을 걷다>를 출간해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출간된 가장 뛰어난 단편집에 수여하는 에지 힐상을 수상했다. 2009년 쓰인 <맡겨진 소녀>는 같은 해 데이비 번스 문학상을 수상했고 <타임스>에서 뽑은 '21세기 최고의 소설 50권'에 선정 되었다. 최근작 <이처럼 사소한 것들>로 오웰상을 수상하고, 2022년 부커상 최종후보에 올랐다. 
 
'양동이와 그 안의 물에 반사된 소녀의 모습'이라는. 키건을 사로잡은 한 이미지에서 비롯된 <맡겨진 소녀>는 한 소녀가 먼 친적 부부와 보내는 어느 여름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출간 이래로 교과과정에 줄곧 포함되어 아일랜드에서는 모두가 읽는 소설로 자리 잡았다. 이 작품은 2022년 룸베어리드 감동에 의해 영화 <말없는 소녀>로 제작되었다. <책 작가소개>


인상 깊은 구절

 
"아주머니의 손은 엄마 손 같은데 거기엔 또 다른 것, 내가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는 것도 있다. 나는 정말 적당한 말을 찾을 수가 없지만 여기는 새로운 곳이라서 새로운 말이 필요하다."(p.25)
▶애정이 없는 가정에서 성장한 주인공. 자신을 향한 따뜻한 감정이 녹아있는 손길을 낯설게 느낀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것에 걸맞은 새로운 표현이 필요하다. 
 
"머그잔을 물에 담갔다가 입으로 가져온다. 물은 정말 시원하고 깨끗하다. 아빠가 떠난 맛, 아빠가 온 적도 없는 맛, 아빠가 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맛이다. 나는 머그잔을 다시 물에 넣었다가 햇빛과 일직선이 되도록 들어 올린다. 나는 물을 여섯 잔이나 마시면서 부끄러운 일도 비밀도 없는 이곳이 당분간 내 집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p.30)
▶ 친척집에 딸을 맡기지만 아빠는 지금 당장은 필요없지만 언젠가는 필요할 물건을 맡기듯 딸을 그곳에 둔다. 
 
"마당을 비추는 커다란 달이 진입로를 지나 저 멀리 거리까지 우리가 갈 길을 분필처럼 표시해 준다. 킨셀라 아저씨가 내 손을 잡는다. 아저씨가 손을 잡자마자 나는 아빠가 한 번도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런 기분이 들지 않게 아저씨가 손을 놔줬으면 하는 마음도 든다. 힘든 기분이지만 걸어가다 보니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한다. 나는 집에서의 내 삶과 여기에서의 내 삶의 차이를 가만히 내버려 둔다. 아저씨는 내가 발을 맞춰 걸을 수 있도록 보폭을 줄인다.(p.69-70)
▶달이 비추는 밤에 주인공은 킨셀라 아저씨와 함께 걷는다. 한 존재가 있음을 의식하면 킨셀라 아저씨는 주인공의 손을 잡아주고, 아이가 걷는 속도로 길을 걷는다. 
 
"넌 아무 말도 할 필요 없다."아저씨가 말한다. "절대 할 필요 없는 일이라는 걸 꼭 기억해 두렴.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p.73)
▶말수가 적은 주인공. 두 귀로 듣는 많은 이야기가 그대로 입으로 쏟아지면 말에 압도당한다. 그 말들은 말을 뱉는 사람들을 집어삼키고, 타인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주기도 한다. 


<맡겨진 소녀>는 "아빠, 내가 그에게 경고한다. 그를 부른다."아빠."로 이야기는 끝이난다.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소녀는 애정이 없는 엄마와 아빠를 다시 맞이한다. 친부모와 다른 애정과 사랑의 온도를 받아본 소녀는 달려간다. 킨셀라 아저씨의 품에 안기며 "아빠"라는 단어를 뱉는다. 킨셀라 아저씨를 아빠로 여기겠다는 뜻인지, 뒤에서 친아빠가 다가오고 있음을 경고하는지 명확하지 않다. 
 
소설을 읽는 내내 '사랑이 아플 수 있다'라는 생각을 했다. 사랑을 받아본 적 없는 소녀에게 잠시 머물게 된 킨셀라 부부의 집은 언젠가는 떠나야 하는 장소이다. 시간의 제약이 걸려 있는 애정은 소녀에게 아쉬움보다는 큰 슬픔이었을 것이다. 함께 있을수록 자신의 몸과 마음을 녹여주는 공간 속에서 자신을 꽁꽁 얼게 만드는 본래의 집은 숨 막히는 공간이 되어 버린다. 
 
나는 혈연으로만 이루어진 집으로 소녀가 돌아가지 않기를 빌었다. 킨셀라 부부가 소녀를 품에 안고 놓아주지 않았으면 했다.  독자 스스로 내릴 수 있는 결말에서 잠시 맡겨진 그 소녀가 다시금 킨셀라 부부에게 돌아갔으면 한다.  맛보지 못한 음식은 나라는 존재에 밖에서 서성인다. 맛본 순간 음식은 나의 경험되고 나를 이룬다. 경험하지 못한 추상적인 애정이 현실이 되었을 때 소녀는 다시 원래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손을 놓지 못하는 짧은 소설. 사랑도, 애정도 아플 수 있다는 사실을 속삭인다... 

 

맡겨진 소녀, 다산책방, 클레어 키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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