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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주정뱅이 - 권여선 소설집

애주가는 아니더라도 해물파전을 보면 막걸리가 생각나고, 치킨 앞에서 맥주를 떠올리는 정도로 술과의 관계를 맺고 있다. 소주 한 잔, 맥주 한 잔, 막걸리 한 잔. 주량을 정해놓은 것은 아니지만 딱 기분이 좋게 뒤탈 없이 먹을 수 있는 내가 마실 수 있는 술의 양이다. 기분이 좋다고, 기분이 나쁘다고 이 양이 줄거나 늘지도 않는다. 매일 마시지도 않는다. 그냥 아주 가끔 먹고 싶을 때 먹을 뿐이다. 어쩌면 술은 내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그 무엇이다. 

술과의 애정도가 한참 떨어지는 내가 읽으려고 고른 책이 <안녕 주정뱅이>라니 어색하다. 권여선 작가의 소설도 처음인데 술과 관련된 책이라니 뭔가 낯설지만 싫지 않은 느낌에 골랐다. 함께 도서관을 갔다가 엄마가 고른 책을 보고 아들이 묻는다. 주정뱅이가 무슨 뜻이냐고. 주정뱅이는 '주정쟁이'를 낮잡아 부르는 말이고, ;주정뱅이'는 주정을 부리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고, '주정'은 술에 취하여 정신없이 말하거나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주정뱅이의 모습을 실제로 본 적이 없는 아들로서는 무슨 뜻인지 알듯 모를듯한 표정을 지을 뿐이다. 

 

권여선 작가는 누구인가?

1965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1996년 장편소설 <푸르른 틈새>로 

제 2회 상상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소설집 <처녀치마><분홍 리본의 시절><내 정원의 붉은 열매>

<비자나무 숲> 장편소설 <레가토><토우의 집>이 있다.

오영수문학상, 이상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동리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 작가 소개란-

 

<안녕 주정뱅이>는 술과 관련된 7편의 이야기(봄밥, 삼인행, 이모,카메라,역광,실내화 한켤레,층)를 싣고 있다. 

술자리는 내 뜻대로 시작되지 않고 제멋대로 흘러가다 결국은 결핍을 남기고 끝난다. 술로 인한 희로애락의 도돌이표는 글을 쓸때의 그것과 닮았다. '술'과 '설'은 모음의 배열만 바꿔놓은 꼴이다. 술을 마시기 위해 거짓 '설'을 연기하던 나는 어는덧 크게도 아니고 자그마하게 '설'을 푸는 小설가가 되었다. -작가의 말-

 

30년 넘는 음주이력을 갖고 있는 작가는 술에서 설을 뽑아낸다. 글을 쓰는 사람은 같은 단어를 써도 이렇게 멋들어지게 표현하다니. 술은 술이지라는 생각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나로서는 술의 작은 소비자일 뿐이다. 그래도 이 책을 읽으면서 술을 통해서 사람들이 빚어내는 이야기가 낯설지 않다. 나 역시 술을 통해서 가까워지고, 멀어지고의 과정을 겪었기 때문이다.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된 후에도 영경은 수환의 존재를 기억해내지 못했다. 다만 자신의 인생에 뭔가 엄청난 것이 증발했다는 것만은 느끼고 있는 듯했다. 영경은 계속 뭔가를 찾아 두리번거렸고 다른 환자들의 병실문을 함부로 열고 돌아다녔다. 요양원 사람들은 수환이 죽었을 때 자신들이 연락 두절인 영경에게 품었던 단단한 적의가 푹 끓인 무처럼 물러져 깊은 동정과 연민으로 바뀐 것을 느꼈다. 영경의 온전치 못한 정신이 수환을 보낼 때까지 죽을힘을 다해 견뎠다는 것을, 그리고 수환이 떠난 후에야 비로소 안심하고 죽어버렸다는 것을, 늙은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봄밤 p.39-

알콜의존증이 심해져 마흔셋에 퇴직을 한 영경, 그녀는 백일 된 아들을 데리고 이혼했다. 예고 없이 찾아온 그녀의 불행. 이혼한 남편과 시부모는 아이를 데리고 몰래 이민을 떠나버렸다. 그녀는 상실이 만든 자리를 술로 채운다. 수환은 류머티즘 환자이다. 영경과 수환의 삶은 죽음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달릴 뿐이다. 영경과 수환은 함께 요양원에 들어왔다. 요양원에 술을 마실 수 없는 영경은 구토와, 불면, 경련과 섬망 증상에 시달리다 견디기 어려우면 외출증을 끊어 요양원 밖에서 술을 마시고 돌아온다. 영경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조금이라도 크게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한 수환은 영경을 보내준다. 

수환의 장례가 다 끝난 후 의식을 잃은 영경은 요양원에 오고 이틀 만에 기억을 되찾는다. 깨어난 영경은 수환의 존재를 기억하지 못했다. 고통을 잊기 위해서 술을 먹었을 영경은 결국 술로 기억을 지운 것일까? 실체화 할 수 없는 기억은 없어도 영경 안에는 그 무언가는 남아있을 거다. 술에 의존하는 삶을 사는 영경. 안타까우면서도 술이 아니었으면 그녀가 상실의 고통을 잊는 순간이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냥 나도 모르게 그녀의 삶을 생각하니 술 한잔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뿐이다.  


결혼을 하고 나서 태우는 큰이모와 외삼촌이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2년째 가족과 관계를 끊고 사라진 큰이모, 도박빚으로 수배 중인 외삼촌. 좋지 않은 사정이라 시어머니는 이 사실을 며느리에게 알리지 않았다. 어느 날 큰이모가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시어머니와 함께 그녀는 병문안을 간다. 글을 쓰는 그녀는 큰 이모가 퇴원 후에 일주일에 한 번 그녀를 방문했다. 

 

큰이모는 대기업에 입사해서 가족들에게 금전적인 지원을 했다. 큰이모의 남동생이 감옥에 가게 되자 큰이모는 그 동안 모아두었던 돈을 빚을 갚는데 써야만 했다. 큰이모는 여러 직장을 옮겨다녀야만 했다. 큰이모의 엄마는 큰이모가 남동생의 서류를 꾸며 몰래 빚보증을 서게 하는 바람에 신용불량자가 되었고, 10년간 빚을 갚았다. 그때부터 큰 이모는 가족들과 관계를 끊고 혼자 살았다.

 

가족이라는 주어진 관계 속에서 큰이모는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살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는 성장할 수 있는 자양분이 되어주는 가족안에서 큰이모는 자신의 모든 에너지와 영양분을 고갈시켰다. 쉰살에 가까워서야 큰이모는 가족을 벗어난다.

사실 나는 가족들과 관계를 끊는 것보다 온라인 관계를 끊는 게 더 힘들 정도였다. 그건 주어진 게 아니라 내가 선택한 거였고, 오로지 내가 쓴 글, 내가 만든 이미지만으로 구성된 우주였으니까. - 이모 p.97- 


큰이모는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차단한다. 한달에 월세 30만원, 생활비 35만원으로 살아간다. 도서관 휴관일을 제외하고 큰이모는 매일 도서관에 간다. 그리고 딱 일주일에 한번 술을 마신다.  혼자가는 삶은 없다지만 평생을 누군가를 부축하면서 살아아가야 했던 큰이모의 무게가 읽는 것만으로 갑갑하다. 

결국 큰이모는 세상을 떠난다. 남은 재산을 시할머니, 시어머니, 태우와 그의 아내에게 남긴다. 시할머니는 모든 재산을 외아들 빚을 갚는데 쓰기를 바랐지만 시어머니는 단호히 거절한다. 오랜 시간을 남동생의 빚을 갚는데 그녀의 삶을 태웠는데, 죽으면서 그녀가 선택한 것을 뒤엎으려는 그녀의 엄마. 그 모습이 진저리 나게 싫다. 어쩌면 우리는 태어나서 주어지는 가족이라는 말로 누군가를 억압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가족이니 참아야 한다고 여기는 것은 아닐까? 주어짐보다는 선택이 많은 삶이었으면 한다. 


<안녕 주정뱅이>를 읽고 가슴이 뻥 뚫리는 시원함은 없다. 술이 녹아들어 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안타까울 뿐이다. 희비가 교차하는 것이 삶이라지만 누군가에게는 비극의 크기가 더 크게 존재한다.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기쁨과 슬픔이 주어진다면 어떨까를 상상한다. 그 무게가 같다면 서로의 슬픔을 잠시나마 짊어질 수 있지 않을까? 이 소설을 읽고 나니 술이 생각난다. 

주류문학의 위엄을 보라고 어느새 속으로 외치고 있다. 술을 적대해온 나는 <안녕 주정뱅이>를 읽고 깊은 고민에 빠진다. 때로 커피잔에 소주를 부어 마셔도 좋은, 아니 마셔야 하는 이유를 비로소 알 것 같다. 취한 감각에 기록되는 다른 질감의 세계, 삶과 인간을 쟤는 다른 방식의 산술, 기만과 연민의 경계를 지워가며 구축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들, 곧 허물어질 것 같은 아슬아슬함을 서늘하게 포착함 권여선의 화자는 결코 독자들의 짐작을 놓치는 법이 없다. 주정뱅이들의 세계에서 그 맨정신은 한층 뚜렷하고, 일그러짐으로써 더 선명해진 그 풍경이 권여선만의 고유함이다. 그녀의 소설이 어떤 근본적인 사람됨과 세상됨의 배치를 보여준다면 그 배치는 뼈처럼 단단한 것이 아니라 장기처럼 뭉클하게 잡히는 어떤 것이다. 알코올중독이 그렇듯이 좋은 소설이 만들어내는 "모든 신체적 감정적 반응들이 거짓"이라 해도 이 거짓보다 나은 진실의 형태가 있을까. 술 마시는 자들을 이야기하는 권여선의 소설, 이 두겹의 거짓이 전달하는 위태하고도 매혹적인 서사, 그리고 한층 깊어진 이해와 연민에 나는 그만 설득되고 만다. -황정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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